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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는 충분해요

다오일주에서 강짱 만난 날

오후 햇살이 길게 머무는 홍은동의 좁은 골목. 그 안쪽에 잡지 페이퍼 사옥이 있어요. 그 옥상에서 강짱(최강희 배우)을 만났어요.

다오랩 안에 ‘다오일주'라는 길드가 있어요. 좋은 어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이번 회차의 어른은 강짱이었어요. 도착해서 다들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골목 안으로 작은 차 한 대가 요란하지 않게 들어왔어요. 강짱이었어요.

다오일주 사람들은 평소 새로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날만큼은 다들 잠깐 머뭇거렸어요. 저도요. 화면으로 너무 익숙한 얼굴이 좁은 골목에 진짜로 들어서니까, 첫 인사를 어떻게 건네야 할지 다들 헷갈렸던 거 같아요.

강짱도 살짝 떨렸나 봐요. '내가 좋은 어른인가' 하는 생각에 만남이 긴장됐는데, '0에서 시작해서 조금은 좋은 어른이 된 것 같아, 감동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왔다' 고 인사를 건넸어요.

1층엔 페이퍼의 지난 30년이 펼쳐져 있었어요. 장소도, 시간도 내어주신 정유희 편집장님과 백쌤님이 동네 시장에서 골라 온 간식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고요. 은은한 막걸리 향을 품은 퐁신퐁신한 잔기지떡, 노릇하게 구워진 전과 쫄깃한 어묵, 싱싱한 딸기, 그리고 편집장님이 직접 담근 새콤달콤한 수제 피클까지. 다오일주엔 ‘자연', '함께 사는', ‘지속가능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래서 접시까지 깨끗이 먹는 걸 즐기기도 해요. 그날 접시도 납작하고 동그란 뻥튀기였고요.

모임은 옥상에서 시작됐어요. 해가 잘 드는 자리였고요. 다오일주 사람들은 그 햇볕 아래에 그대로 앉아 있었어요. 강짱이 그걸 보더니 한 마디 했어요. "제 주변 분들은 해 있으면 가리려고 다들 열심히 노력하시는데, 여기 분들은 해가 있는데도 손으로도 안 가리시네요." 맞아요. 저는 심지어 선크림도 안 발랐는걸요.


그날 마음에 박힌 단어는 ‘쓸모'였어요. 자존감이 낮아질 때 헌혈을 했다는 강짱의 말에 잠깐 멈칫했거든요. 내 쓸모는 뭐지, 같은 생각이 짧게 스쳤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동안 저는 제 쓸모를 끊임없이 찾고, 채워왔던 것 같아요. 내 쓸모를 만들어, 그걸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 바쁘게 하루하루를 채웠던 거 같아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자꾸 다른 한 문장이 떠올랐어요.

"좋은 어른은 너무 바쁘지 않은 사람."

아무리 대단해도 옆에 쓰러진 누군가를 챙길 시간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요. 그래서 본인은 기댈 수 있는 곁을 내어주기 위해 일부러 너무 바쁘지 않으려 한다고요.

이 말이 늦게 도착했지만, 계속 맴돌아요. 일을 잘하려는 것과 쓸모 있어 보이려 바빠지는 건 다른 일인데, 둘은 자주 헷갈렸어요.

며칠이 더 지나, 페이퍼 매거진 269호 새로고침' 이라는 주제로 강짱의 인터뷰가 실린 호를 펼쳤다가 또 한 번 마음에 머물렀어요. 자신의 쓸모를 언제 느끼냐는 질문에 강짱은 이렇게 답했더라고요.

"제 쓸모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쓸모를 더 많이 누리고 살아요."

함께하는 PD님의 다정함, 라디오 작가님과 청취자분들의 소중함을 느낀다고요. 자기 쓸모를 만들어내는 대신, 다른 사람의 쓸모를 누리며 산다는 표현. 옥상에서 들은 한 마디와 같은 결의 다른 문장이었어요.

그리고 그날 강짱이 보여준 모습도 같은 결이었어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강짱은 거꾸로 우리에게도 물었어요. "오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인터뷰어가 듣는 자리에 머무는 건 흔치 않은데, 그날 강짱은 자주 듣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어요.


7년 동안 하이브아레나라는 코워킹·코리빙 공간을 운영했어요. 그때 가장 공들였던 일이 환대였어요. 처음 오는 사람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람이 들어올 자리를 비워두고,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곁이 되어주는 일. 생각해보면 그게 강짱이 말한 "바쁘지 않음"과 같은 결이었네요. 환대하려면 시간이 비어 있어야 하니까요.

작년에 강화도로 이사를 왔어요.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요. 아이는 작은 학교에 다니고, 저는 여기서 자연과 더 가까이 살아요. 지나가다 동네 사람을 어쩌다 마주치면, 햇볕을 머금은 상추며, 진한 향의 허브며, 이름 모를 채소들을 한 봉지 가득 나눠줘요. 강화 앞바다에서 상합을 한가득 캐 오는 날엔 이웃들끼리 공동구매를 하기도 해요. 그렇게 저녁은 온 가족이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어 먹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쁘지 않기 때문 이에요. 바쁘면 마당의 상추를 누군가 줄 생각이 안 나요. 바쁘면 상합 같이 사자는 카톡에 답장도 못 해요.


얼마 전 글로벌 기업의 임원으로 승진한 친구한테 전화가 왔어요. 시간을 촘촘히 쪼개서 바쁘게 일정을 관리해야 하는 친구예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약속을 잡지 않아도, 갑자기 전화해도 되는 친구가 한 명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게 저였대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통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 전화를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어요. 통화 끝엔 "언제든 또 편히 연락해" 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고요. 그런 바쁘지 않은 제가 고마웠어요.


강짱을 만나기 전엔 잘 몰랐어요. 제가 강화도로 옮겨오면서 진짜 원했던 게 뭐였는지. 쓸모를 더 만드는 삶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쓸모 있는 사람들 곁에, 시간 가진 채로, 머무는 삶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 인터뷰 어느 즈음, 우울할 때 어떻게 견디냐는 질문에 강짱은 이렇게 답했어요.

"그냥 존재만으로도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다 무기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쓸모를 더 만들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말. 그 말이 자꾸 마음에 머물러요.

저에게도, 제 아이에게도, 제 곁의 사람들에게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저부터 너무 바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옥상의 햇볕 아래, 손으로도 가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던 우리처럼요.